제 1장
19세기 초반의 조선.
근대의 해풍이 불어오는 항구는 익숙한 모습의 한국인들과, 조금 다르게 생긴 외국인 몇 명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의 외양을 물끄러미 보던 현우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한껏 신난 얼굴로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얘들아, 너희 얼마 전에 생긴 호수 얘기 알아? 귀신 나오는 호수!“
"저 산에 갑자기 생겼다는 귀신 나오는 호수 말하는 거야, 현우야?“
"응! 그 호수, 원래 없었는데 한 맺힌 귀신이 그곳에 머무르면서 만들어진 거래."
"에이, 뭐 그런 얘기를 믿냐?"
"그 소문은 나도 들었어. 하지만···."
무당 집 아들인 강림의 조곤한 목소리에 모두가 말을 멈추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지도 아니고 웬 산 중턱에 생겼다는 수상한 호수. 그 호수가 있는 위치를 어림하여 그곳을 뚫어져라 보던 강림이, 이윽고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너무 멀어서 그런가, 잘 모르겠어. 귀신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아.“
"그래?"
현우가 실망했다는 듯 몸을 추욱 늘어뜨렸다. 야, 귀신 안 나오면 다행이지! 허리에 손을 척 짚고 외친 하리가 현우에게 대꾸했다. 그런 현우를 위로하려는 듯, 가은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호수가 생긴 건 진짜일지도 몰라. 요 몇 주 계속 늦장마였잖아.“
"아, 물이 고여서 호수처럼 보인 걸 수도 있겠다!“
"그럴지도.“
"가은이 똑똑하다!"
야무지게 가은에게 팔짱을 낀 하리가 맑은 웃음을 지었다. 요새 이 근방에서 잘 나가는 상인 집 딸인 가은은, 가끔 이렇게 열두 살 치고는 꽤 깊은 통찰력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상인인 엄마 아빠한테 물려받은 머리인가? 그리 생각하던 하리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무당 집 아들인 강림과, 잘 나가는 상인 집 딸인 가은, 그리고 그에 비하면 평범하지만 부족한 것 없이 먹고 사는 어부를 부모로 둔 자신과 현우. 이 넷은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동갑내기로 태어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적부터 함께 마을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놀았다. 덕분에 둘도 없는 친구들이 된 이들은, 오늘도 놀 곳을 찾기 위해 마을 이곳저곳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그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던 바다는 어느새 항구가 되어 사람들로 북적였기에 놀이터로 적합하지 않았고, 때문에 그들은 새롭게 놀 곳을 찾아야 했다. 지금도 소금기 넘치는 바람이 불어오는 항구 근처에서 서성이던 일행은, 현우는, 끄응, 하고 머리를 굴리더니 일행들에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 그 호수에 가보면 안 돼? 진짜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보고 오자."
"위험할지도 몰라. 되도록이면 안 가는 게···."
"강림이 네가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는데, 괜찮겠지!"
"뭐, 그럼 가볼 곳도 없으니까··· 거기에라도 가볼까?"
"위치는 내가 알아!"
금세 신이 난 현우가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번쩍 몸을 일으켜세우며 말했다. 동의하는 투의 하리도 현우도, 어른들에게 주 놀이터를 빼앗기는 바람에 마음껏 놀지 못해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귀신 얘기에는 귀도 안 기울였을 하리가 동의를 보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요 며칠 비교적 지루하던 참인 가은도, 하리와 현우의 말에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남보다 뛰어난 기감을 가지고 태어난 강림이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는데, 일행들로서야 뒷산을 끼고 지내니 망설일 것이 없었다. 강림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확실하게 귀신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은근히 가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내는 일행들에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 모두가 동의하자마자 마을과 바다를 낀 신기한 구조의 뒷산으로, 현우가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잽싸게 뛰어가는 모습에, 일행들이 현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그 뒤를 따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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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야, 현우야?"
"아니, 그쪽은 절벽이야. 길은 이쪽."
"··· 아,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요즘 절벽 쪽으로 계속 파도가 치고 있어서 절벽 쪽에는 특히 가지 말라셨어. 땅이 침식돼서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하시더라."
"··· 침식이 뭐야?"
"깎인다는 뜻이야."
그렇구나. 가은의 말에 하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으로 들어온 지 꽤 지난 것 같은데, 어쩐지 선두에 선 현우가 길이 아닌 곳만 골라서 가고 있었다. 장마가 며칠 전에 끝난 덕에 공기는 여름 치고 선선했으나, 길이 아닌 곳은 흙이 조금 미끄러웠고, 잡을 만한 나뭇가지들도 전부 젖어있었다. 갈수록 험난해지는 여정에, 하리가 현우의 뒤를 따라가며 미심쩍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현우, 이쪽 길 맞아?"
"··· 마, 맞거든! 조금만 더 가면 나온다고 마을 어른들이 그러셨어."
"확실한 거야?"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작게 중얼거리던 하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리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가은은 조금 더운지 자수를 놓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있었고, 강림은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원래도 토를 다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쯤이면 의심 한 번 해볼 법도 한데. 미묘한 침묵에 고개를 갸웃, 기울인 하리가 강림을 향해 물었다.
"강림아, 많이 더워? 아까부터 말이 없길래. 더위라도 먹으면 큰일이니까."
"··· 응? 아, 아니야, 하리야. 난 괜찮아. 너는?"
"난 괜찮아. 가은이가 좀 더워보이네."
강림은 가은에게 제 손수건을 내밀어준 뒤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리는 열심히 수풀을 헤쳐나가며 앞장서는 현우를 보았다. 호수를 찾는 데에 열중이라 뒤편의 대화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배는 잘 못 타도 산 하나는 그럭저럭 잘 타는 현우가 앞장서며 터준 길을 잘 밟아가며, 하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강림을 보았다. 평소와 비슷한 무표정이었지만 어쩐지 의문이 서린 듯한 얼굴이었다. 의문과 의심, 미심쩍음, 그리고 다시 의문. 어딘가 걸리는 구석이 있는 걸까. 강림은 꺼림칙한 구석이 있어도 잘 말해주지 않는 성정이었기에 하리는 어쩐지 약간 굳은 무표정을 한 강림에게 재차 물었다.
"강림아,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은데."
"그건 아니지만······."
강림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내려가는 게 좋겠어. 귀신은 아니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가···."
"앗, 찾았다! 호수!"
"뭐? 정말?"
현우의 말에 일행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 몇 주간 돌고 있는 뜬구름 같은 소문인 줄 알았더니, 과연 호수는 정말 있었던 모양이었다. 현우의 말에 놀라 앞으로 뛰어나간 하리가, 고작 산에 위치한 호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크기의 호수를 보았다. 이 정도면 평지에서도 꽤 넓은 호수였다. 일행들이 서 있는 반대편에는 크기가 작은 골이 있어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물은 척 보기에도 맑았으며 깊이는 꽤 깊어보였다. 다만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호수 근처는 물론이요, 호수 안에는 아무 생명도 살지 않는 듯했다.
하다못해 자그만 장구벌레나 개구리, 귀뚜라미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의 호수. 이런 산에 이런 호수가 생겼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기에 일행은 전부 고개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독 산행을 더워했던 가은이 먼저 앞으로 나아가 호수 근처에 쪼그렸다. 가은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는 호수는 방금 우물에서 떴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맑은 담수로 보였다. 안심한 가은이, 손을 뻗어 물을 한 모금 떴다. 맑게 찰랑거리는 물을 조심스레 입으로 끌어와 한 입 마신 순간.
쿨럭.
가은이 물을 마시다 말고 손에 담긴 물을 떨쳐내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 모습에 놀란 하리가 얼른 가은에게로 뛰어가 가은의 어깨를 감쌌다.
"가은아! 괜찮아? 목에 걸렸어?"
"난 괜찮아, 하리야. 목에 걸린 건 아냐. 물이···."
"물이?"
"물이 짜. 바닷물 같아."
바닷물? 더욱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하리의 옆에 어느새 다다른 강림과 현우가 있었다. 가은의 말에 무릎을 내려 앉아 손가락 끝에 물을 콕, 찔러 입에 대본 강림이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렸다.
"바닷물이야. 왜 이런 곳에 있지?"
"엥?"
"웩, 정말이네!"
안 그래도 입안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바닷물까지 들어가니 오만상을 한 현우가 혀를 내밀었다. 얼떨떨한 진실에 하리 역시 고개를 숙여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나 짠물이었다. 바닷물과 염도가 비슷한 짠물. 고개를 숙이니 옅은 소금물 향, 그러니까 바다향도 났다. 수풀에 있었을 때에는 수풀 내음에 눌려 소금물 향이 나지 않은 듯했다. 우선 가은의 등을 툭툭 두드려 진정시킨 하리는, 한아름 펼쳐진 호수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민물에서 사는 벌레라곤 단 한 종류도 없었다. 맨바닥이 훤히 보이는 호수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허리를 숙인 하리가, 목을 빼어 호수 안쪽의 밑바닥을 노려보았다.
자잘한 돌부터 시작해서 크기가 큼직한 돌들이 빼곡히 놓여있는 호수의 밑바닥. 동글동글한 돌이 아닌, 이리저리 구멍이 난 울퉁불퉁한 바위인 것으로 보아 바다의 것임은 확실했다. 드물지만 바위 틈틈이 자그만 산호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조개도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기르기 위해 부러 만들어 놓은 어항 같았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하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숙이니 하리의 코에 수면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그것을 본 강림이 혹시 하리가 빠질까, 제재하려던 찰나,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있던 현우의 목소리에 강림은 물론이고 하리 역시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저게 뭐지?"
"왜? 뭐 있어?"
"저기 봐, 호수 가운데. ··· 서, 설마 진짜 물귀신인가?"
물귀신? 과연 생명 한 점 느껴지지 않는 호수에 물귀신이라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강림은 아까부터 무언가 꺼림칙한 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현우가 있는 곳으로 후다닥 달려가고 있었고, 하리는 아예 자리에 앉은 채 물 속을 더욱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물은 맑았지만 주변에 높게 솟은 나무 때문에 빛이 잘 비치지 않는 호수의 가운데는 유독 더 시커맸다. 단순한 명암의 차이가 아닌, 물이 정말 시커먼 것처럼 더 어두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호수의 가장자리와 중심부의 투과도가 이리 차이날 리가 없었으니까. 혹시 하리가 빠질까 하리를 살짝 잡은 가은 역시 호수를 보고 있었다. 하리가 눈을 살짝 찌푸려 더욱 집중했다. 현우가 가리킨 곳을 빤히 바라보니, 과연 무언가 시커멓고 물고기라기엔 꽤 큰 것이 뭉글뭉글하게 보이고 있었다. 저게 뭐지? 잘 보이지 않는 형체에 하리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집중했다. 일행 모두 긴장했는지 말이 없었고, 강림도 긴장한 눈치였다. 허리춤에 맨 칼에 손을 대고는 있었지만 뽑지는 않은 채였다. 현우는 그런 강림의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면서도 호수의 한가운데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호수 정중앙의 밑바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자의적으로 속도를 늦추어 올라오는 것인지, 아니면 호수 밑바닥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깊은 건지 알 길은 없었다. 그저 무언가가 물결을 유려한 움직임으로 헤치며 올라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보글보글··· 거품도 희미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올라온다.
일행이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물귀신인지 물고기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인영에 모든 일행이 말도 잊고 집중한, 그 찰나. 마침내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수면에 거의 도달했을 때즈음.
퐁.
호수의 한가운데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나타난 것은···
···
···
···.
사람?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