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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철썩.

 

 

절벽으로 치는 파도는 이미 꽤 거칠어져 있었다. 거친 파도가 거의 두 달 남짓 절벽을 매질했기 때문일까. 절벽 끝에 피어 있던 갖가지 수풀들은 이미 파도에 쓸려나가고 없었다. 그나마 파도에 젖은 땅만 위태롭게 버티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곧 무너져내릴 듯 보였다.

 

 

'···!'

 

 

그리고, 바다와의 해후를 즐길 틈도 없이.

 

 

남자와 눈이 마주친 리온은 재빨리 다시 바다로 숨었다.

 

 

이대로 다시 잡힐 수는 없었다. 일행이 어떻게 데려다준 곳인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서 데려다준 곳인데. 겨우 붙잡은 자유를 이렇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곧 바다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리온이 할 일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바깥에서 남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저와 하리, 가은을 찾는 듯했다. 남자 몇 명이 물 속으로 걸어오려는 것이 보였지만, 대부분 허리를 넘기지 못하고 다시 뭍으로 올라갔다.

 

 

'이쪽 수온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어.'

 

 

늦가을에서 슬슬 다가오기까지하는 초겨울. 가뜩이나 동쪽 해안 지방이라 늦가을이라도 온도는 다른 곳의 겨울과 다름없는 이곳의 수온을,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어를 찾으러 바다에 제대로 뛰어들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이 춥고 고달픈 바다에 빠지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30분 남짓. 어느새 체온이 바다와 비슷하게 맞추어진 인어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꾸만 뭍을 흘끔거렸다.

 

 

'잘 도망쳤어야 하는데···.'

 

 

바다에 와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인어를 되찾은 바다는 어느새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특히 절벽에 치던 파도. 그것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절벽 너머꺼지 쳐대던 거센 파도가, 차차 사그라들더니 곧 절벽의 절반만큼도 못 미치는 높이가 되었다. 리온이 바다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 파도가 마을을 삼켰을 것이었다. 리온이 멀리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해안 근처를 서성이며, 뭍을 힐끔거렸다.

 

 

제발, 무사히 들어가야 해.

 

 

리온이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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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시각, 하리와 강림은 서로 반대편으로 달리고 있었다.

 

 

하리는 쫓아오는 이들을 피해 산을 오르고 있었고, 강림은 산의 중심부를 맴돌듯 하산하고 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을 쫓기 위해 남자들은 분산되었지만, 산을 오르는 하리 쪽에 세 명, 강림 쪽에 두 명이 붙었다. 두 명이라면 모를까, 아이가 세 명의 포위를 따돌리기에는 꽤나 역부족이었다. 남자들을 겨우 따돌린 강림과 달리, 멈추지 못하고 산을 오르는 하리. 현우라면 저 남자들을 진즉 따돌렸을까. 그리 생각한 하리가, 아예 횃불을 치든 채 쫓아오는 남자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어느 정도 거리는 벌렸지만, 여전히 저를 쫓아오는 이들. 슬슬 체력이 바닥나고 있던 참이었기에, 하리는 더 도망치는 것 대신 수풀이 유독 우거진 곳에 잠시 몸을 숨기기로 했다.

 

 

"헉, 헉······."

 

 

그 근처다. 호수. 수풀이 이렇게나 우거진 곳은 그 호수 주변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명 호수 근처에 있는 남자들이 더 많으리라. 아마 지금쯤 모든 내용을 전달받고, 있어야 할 인어가 사라졌다며 그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겠지. 현우와 가은은 좁은 동굴에 숨겨놓았으니 걱정할 것이 없지만, 강림은 잘 도망쳤을까. 하리는 그 순간에도 가장 위험한 자신 말고 다른 이를 생각했다.

 

 

"어디 갔어?!"

 

"빨리 나오지 못해?"

 

 

나올까보냐. 위협적으로 주변을 뒤적이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하리가 수풀 안쪽, 더 우거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이고, 몇 번의 발걸음을 디디던 그때.

 

파삭.

 

"!"

 

"저기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으며 파삭, 하는 큰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하리가 있는 곳을 돌아본 남자들이, 어렴풋한 아이의 형상을 발견하고선 그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하리가 수풀 안쪽, 나무와 풀이 우거져서 발 디디기 힘든 곳까지 뛰며, 산을 올랐다. 이제 산의 고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말인 즉슨,

 

 

하리가 도망갈 수 있는 곳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산꼭대기는 절벽인데···.'

 

 

뒤에서 수풀을 제대로 헤치지 못해 쩔쩔매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풀이 빽빽하게 서 있어, 아이가 아니고서야 빠르게 돌파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잘 됐다. 남자들이 오는 것을 포기하면, 다시 동굴로 돌아가 조심히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 생각한 하리가, 얼마 남지 않은 절벽을 향해 뛰던 순간.

 

 

"어어!"

 

"조심해!"

 

 

누군가 털썩, 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나무뿌리에 걸린 모양이었다. 하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시야가 환해지며, 춥기만 했던 사방에서 따뜻하다못해 뜨거운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춥고 서늘한 밤이 가시고, 따스하고 포근한 낮이 내려앉은 느낌. 그와 동시에 순간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숨을 멈추고, 하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

 

"피해!"

 

화르륵······.

 

 

넘어진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이, 바닥에 내팽겨쳐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수풀에 불이 붙었다.

 

 

'불이···!'

 

 

서리도 끼지 않은 건조한 나뭇잎과, 딱딱하고 단단하기 그지없는 나무뿌리.

 

불이 붙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화륵. 순식간에 주변 수풀로 번지는 불에, 남자들이 저 멀리 절벽에 거의 다다른 하리와 돌아가는 것 중 갈등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틀린 것을 알고 뒤로 빠지는 남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번지기 시작하는 불에, 나머지 남자들도 결국 손을 휘저으며 불을 피해 하산길로 도망쳤다. 따사롭다못해 뜨거운 불길. 잠깐 몸을 녹이기에는 좋았을지 몰라도, 순식간에 마른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다시 가지에서 이파리로 뻗치는 불은 자비없이 주변을 야금야금 삼켜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완전히 철수하는 것까지 확인한 하리가, 서둘러 불이 갉아먹는 곳을 피하며 눈을 굴렸다.

 

 

'산을 내려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불을 피해 다른 길을 모색하던 하리는 곧 주춤거리며 다시 산꼭대기 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불이 갈 만한 길을 죄 삼켜버린 탓이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대를 죄 태워버린 환한 불빛. 한밤중에 피어난 화려한 불꽃에, 마을 사람들도 깨어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저, 저기···!"

 

"부, 불이다! 불이야!"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마을. 화르르 불타는 소리 사이로 들리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에, 하리가 힐끔 마을을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아주 조그맣게 보일 정도의 높이. 저곳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하리. 한편 겨우 산을 내려와 마을로 돌아가려던 강림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마을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왜 그러지? 강림이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곧 어떤 여성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가, 우리 현우가! 현우가 없어요!"

 

"설마 저 산에 들어간 건···!"

 

"아아, 안 돼!!!"

 

 

혼비백산이 된 마을. 자신의 아이가 사라졌다는 어머니들의 울음이었다. 곧 매캐한 연기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강림이, 야밤에 대낮처럼 밝은 산의 저편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하리의 인영도.

 

 

"가은아! 가은아! 어디 있니!"

 

"하리야···!!!"

 

"잠깐, 진정해야···."

 

"불! 불을 꺼!"

 

"양동이를 가져와!"

 

 

강림이 외친 목소리가, 하리에게 전혀 닿지 않는 듯했다. 그저 혼비백산이 된 마을을 한 번, 눈앞의 불길을 한 번 본 하리는, 또다시 휩쓸려오는 불길에 결국 산꼭대기로 도망치고 있을 뿐이었다.

 

 

"하리야, 거긴 안 돼!"

 

 

어느샌가 불길 속으로 사라진 하리. 거의 다다른, 수풀이 없는 절벽. 그곳에 있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산꼭대기는, 그 절벽은.

 

 

파도가 몇 달이고 거세게 쳐댔던 절벽.

 

하리는 그것을 잊은 것일까, 계속해서 절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위험해···.'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각자의 집에서 양동이를 꺼내, 바닷물을 퍼나르기 시작했다. 적어도 불이 마을에까지 번지는 것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의 꼭대기 즈음에서 시작해, 점점 위아래로 번져나가는 불길. 그 불길 속으로 사라진 하리의 모습에, 강림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강림의 앞으로 불에 활활 타고 있는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작은 산을 온통 삼킬 그 위압감에, 강림의 헛숨을 들이삼켰다. 저 불길을 뚫고 갈 방법이······.

 

 

'없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문 강림이,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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